발해사가 우리 역사인 이유 7가지 역사이야기

  • 역사자료|2007/06/19 11:00
발해는 한국사인가? 중국사인가?
현재 중국은 동북공정이라는 미명하에 우리의 고대사를 송두리째 빼앗으려고 한다. 그들은 고구려 뿐만 아니라 고구려의 후예인 발해, 고구려의 전신인 부여 ,그리고 우리의 뿌리인 조선마저 그들의 역사라 우기고 있다.
어제 뉴스를 보니 중국에서 발해에 관련된 18편의 논문을 발표했다고 한다. 하나같이 발해가 중국사이고, 발해는 중국왕조의 지방정권이라는 얘기였다. 과연 발해는 그들의 주장대로 중국왕조의 식민정권일까? 이에 나는 발해가 왜 우리 역사인지 그 이유를 고찰해보고자 한다.
먼저 발해에 관한 중국 측의 주장을 살펴보자
1. 발해 건국의 주도세력인 대조영은 말갈족
2. 발해는 주권을 가진 독립국가가 아니라, 당나라의 통치범위 안에 든 지방정권
3. 발해의 문화는 당의 문화를 모방
중국은 발해는 당왕조의 책봉을 받는 주권이 없는 반식민지 국가라 한다. 하지만 그들의 논리는 허점이 많은 논리이다. 이제 본인은 왜 발해가 우리 역사일 수 밖에 없는지 그 이유를 살펴보고자 한다.
1. 대조영은 말갈인인가? 고구려인인가?
대조영의 출자에 대해 기록한 사서로는 삼국유사, 구당서, 신당서이다.
"대조영은 고구려의 옛 장수이다" - 삼국유사 -
"대조영은 본래 고구려의 별종이다 (大祚榮者 本高麗別種也)" - 구당서 -
"대조영은 속말말갈로 고구려에 붙은 자" - 신당서 -
대조영의 출자에 대해 삼국유사는 고구려로, 신당서는 말갈로, 구당서는 고구려의 별종으로 보고 있다. 여기서 별종의 의미가 무엇일까? 별종이라 하면 으례 다른 종족을 뜻한다고 보는 사람이 있겠지만 여기서의 별종은 그런 의미가 아니다.
일본과 중국의 학자들 은 고구려 별종이란 '고구려 종족이 아닌 다른 종족'이라는 뜻이라고 보며, 남북한 학자들은 고구려 별종이란 '고구려에서 나온 가지'라는 뜻이라고 새기는 것이다. 그러나 별종이라고 T 는 구당서 발해전에 [(발해) 풍속은 고구려 거란과 같다(風俗與高麗及契丹同)]고 분명히 하 고 있으며, 별종이란 용어도 그 책에 나온 용례를 모아보면 간단히 결론이 나온다.

구당서에 나온 별종의 예
"고려(고구려)는 부여에서 나온 별종이다(高麗者 出者夫餘地別種也)"
"백제국은 본래 부여의 별종이다(百濟國 本亦夫餘之別種)"
"철륵은 본래 흉노의 별종이다(鐵勒 本匈奴別種)"
"해국은 대개 흉노의 별종이다(奚國 蓋匈奴之別種)"
"실위는 거란의 별류이다(室韋者 契丹之別類也)"
"습은 대개 흉노의 별종이다( 蓋匈奴之別種也)"

신당서에 나온 별종의 예
"고구려는 본래 고구려의 별종이다(高麗 本夫餘別種也)"
"백제는 부여의 별종이다(百濟 夫餘別種也)"
"거란은 본래 동호의 종(種)이다(契丹 本東胡種)"
"해 역시 동호의 종(種)이다(奚亦東胡種). 실위는 거란의 종(종)이다(室韋 契丹別種)"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로서 고구려에 더부살이(附)하던 자인데 성은 대씨다( 渤海 本粟 末靺鞨附高麗者 姓大氏)"

별종, 별류, 종 등은 모두 '어디서 나온 가지'라는 근원을 밝히기 위해 사용한 유사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발해에 대한 설명만은 구당서와 신당서에서 현격한 차이가 나타난다. 신당서에서도 다른 민족은 별종이라고 쓴는데 유독 발해만은 [고구려별종]에서 [속말말갈부고려자]로 크게 바뀌어 버린 것이다. 신당서는 구당서 이후 100년 이상 지난 1060년 송나라 구양수, 송기 등이 편찬한 사서인데, 송나라 때 중화사상의 강화와 중국의 명예를 위해 역사를 쓰는 필법을 사용했기 때문에 구당서보다 훨씬 충실하다고 인정되어 후대 중국 사가들이 많이 읽고 인용한 사서이다. 그러나 객관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송나라의 사가들이 아전인수 식으로 재해석한 신당서보다는 그보다 100년 이전에 쓴 구당서의 기록이 가장 신빙성 있는 것이기 때문에 발해의 근원은 구당서의 기록이 정확한 것이다.
위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대조영은 중국측의 주장대로 말갈인이 아닌 고구려인이다. 그리고 말갈에 대해 한규철 교수는 고구려의 변방민을 중국 측에서 낮추어 부른 용어 즉, 특정민족이 아닌 변방의 주민을 통칭하는 일반명사라고 한다. 그리고 말갈 역시 예맥, 부여계와 그 뿌리를 같이한다.
2. 사서에 기록된 발해
삼국유사, 고려사, 발해고, 고려도경, 구당서, 속일본기, 책부원구 등 옛 역사책을 보면 발해가 고구려 유민인 대조영이 세운 국가라고 기록되어 있다.
『구당서(舊唐書)』
"발해말갈-고구려가 멸망한 이후 대조영이 그 일가를 거느리고 영주에서 일어났다."
『속일본기(續日本記)』
"발해는 옛 고구려국으로 당의 장수 이적이 고구려를 멸하자, 그 후 조공이 오래 끊어졌는데 지금에 이르러 발해가 영원장군 고인의 등 24인을 보내???"
『속일본기(續日本記)』 神龜5년 1월 17일조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고 부여에서 전해 내려온 풍속을 간직하고 있다 (復高麗之舊居 有夫餘之遺俗)]"
『속일본기(續日本記)』 神龜4년 9월12월 29일조
"발해는 옛날 고구려다(渤海郡者 舊 高麗國也)"
『책부원구(冊府元龜)』
"진국(대조영이 발해를 건국했을 때 채택한 국호)은 원래 고구려이다."
『삼국사기』
"총장 원년(668) 영공 서적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쳐부숴 안동도독부를 설치하고, 의봉 3년(678)에 이르러 그 백성들을 하남과 농우( 右)로 옮겼다. 그러나 고구려의 잔당들이 무 리를 모아가지고 북쪽의 태백산 밑을 근거지로 하여 나라이름을 발해라 하였다."
----> 신라 말 대학자인 최치원이 당의 태사시중에게 보낸 편지
『동문선』
"옛날 당나라의 고종 황제가 고구려를 쳐 없앴는데 그 고구려는 지금 발해가 되었다"
----> 최치원이 다른 당나라 관리에게 보낸 편지 내용
3.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했음은 일본에 보낸 외교문서가 증명
당시 발해는 일본과 많은 교류를 했다. 그러므로 일본에는 발해와 관련된 많은 유물, 유적이 많이 남아있다. 발해가 일본에 보냔 외교문서를 보면 발해 임금이 스스로를 '고려국왕(高麗國王)'이라 칭했는데 여기서 고려는 왕건의 고려가 아닌 고구려를 말한다.
발해 3대 문왕이 일본에 보냔 외교문서를 보면 스스로를 '고려국왕 대흠무'라고 표기하였고, 일본에서 사신이 오자 문왕은 "이 땅은 고구려의 영토를 회복하고, 부여의 유속을 이었 으니 너희 일본은 우리를 옛 고구려를 대하듯 하라"라고 호통을 치기도 하였다.
일본 나라현 평성경에 목간이 발견되었는데, 이 목간에서는 발해를 고려라 부르고 있다.
依遣高麗使廻來 天平寶字二年 十月 八日 進二階級 758년 발해 사신 양승경 일행과 함께 귀국한 일본의 오노 다모리(小野田守) 일행을 2계급 특진시킨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발해에 보낸 사신을 '견고려사(遣高麗使)라고 해 발해를 고 려로 불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4. 발해의 유적은 고구려의 것을 계승
발해의 유적이 당나라 것을 모방했다고 당의 속국이라는 중국의 주장은 논리의 비약이 심하다. 발해의 유적을 살펴보면 당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도 있지만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유적도 엄연히 존재한다. 발해의 문화가 고구려의 전통을 계승했다는 것은 발해의 성곽 같은 문물을 통해서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발해의 수도인 상경용천부는 성의 축성방법, 성안의 도시계획에 이르기까지 고구려의 전통을 이어받았다. 상경용천부의 외성의 성벽은 고구려가 평양성의 평지에 쌓은 성벽 축조방법과 마찬가지로 성벽의 외연을 쌓고 그 안에 흙을 다져쌓는 판축방법으로 축성하였다. 게다가 발해의 남경남해부로 추정되는 함경남도 북청군 하호리 동해에 청해토성이 있는데, 이 성의 성벽 중앙에서 성문이 설치된 것으로 보이는 옹성 형식의 문터가 확인되었다. 옹성은 고구려의 독특한 성 방어 시설물이다.
발해 3대 문왕의 둘째 딸 정혜공주 묘를 보면 고구려의 무덤 양식인 굴식 돌방무덤 양식을 계승했다. 또한 발해의 무덤을 보면 고구려 무덤과 같이 벽화가 그려져 있다. 그리고 발해의 유적에 온돌이 있는데, 온돌은 고구려의 난방시설이다. 이러한 유적들의 존재는 발 해가 고구려를 계승했음을 알 수 있다.
5. 빈공과와 쟁장사건
만약 발해가 당(중국)의 지방정권이라면, 빈공과를 응시할 수 없다. 빈공과는 당이 외국 유학생들을 위해 따로 마련한 시험이다. 만약 발해가 중국의 지방정권이면 명경과, 제술과에 응시해야지 어떻게 빈공과에 응시하는가?
또한 발해와 신라 사신 간의 자리다툼인 쟁장사건 또한 발해가 독립국이었음을 말한다. 사신과 신하들이 임금을 뵙는 조회는 따로 구별되어 있었다. 조회에서 발해와 신라가 서열 다툼을 한 것은 이들이 외국의 사신이기 때문이다. 만약 발해가 지방정권이면 신라와 서열 다툼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중국 한 지방의 도독과 서열 다툼을 하기 때문이다. 쟁장사건, 빈공과 응시는 결국 발해가 독립국임을 밝히는 것이다.
6. 조공과 책봉은 동아시아의 한 관례
책봉과 조공은 그 당시 동아시아 국제질서이자, 하나의 관례였을 뿐이었다.
이를 가지고, 발해가 당 왕조의 책봉을 받은 걸 가지고 중국의 지방정권이라고 하는 것은 한 마디로 소가 웃을 노릇이다. 당의 발해왕에 대한 책봉 즉, 당이 발해 임금을 홀한주 도 독(忽汗州 都督)으로 가수(加授)한 것은 명목상일 뿐이다.
이를 가지고 발해가 중국의 지방 정권이라고 한다면 계림도독(鷄林都督)으로 임명받은 신라 또한 중국의 지방정권이라고 해야 하는데 중국이 그렇게 주장하는가? 더군다나 당나라는 당나라를 위협한 돌궐, 토번 등의 국가를 책봉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당의 번속국이었나? 오히려 이들은 당나라를 공격하여 당나라를 멸망에 빠뜨릴 번 하지 않았는가? 이는 중국 스스로 논리적 모순에 빠진 것이라 할 수 있다. 고로 중국의 주장은 억지 일 수 밖에 없다.
7. 발해는 지방정권이 아닌 황제국
우리는 발해가 연호를 정하고 스스로를 황제라 한 황제국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발해가 황제국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설마~ 하는 반응을 보일 것이다. 하지만 발해는 연호를 정하고 스스로를 황제라 칭한 황제국이었다. 문헌상으로 발해의 군주는 연호를 사용하였는데, 연호는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었다. 그리고 발해가 독자적으로 연호를 사용했다는 것은 발해가 당과 대등한 지위를 지닌 국가였다는 것을 말한다 볼 수 있다. 당시 동아시아를 보면 당 중심의 국제질서가 성립되었고 이런 당 중심의 국제질서에는 신라가 포함되었다. 그런데 발해가 스스로 황제라 칭하고 연호를 정한 것은 신라와 달리 발해와 당이 대등한 帝國임을 나타낸다 할 수 있다.
신당서』「발해전」를 보면
발해 제2대 무왕은 인안
3대 문왕은 대흥
5대 성왕은 중흥
6대 강왕은 정력
7대 정왕은 영덕
8대 희왕은 주작
9대 간왕은 태시
10대 선왕은 건흥
11대 이진왕은 함화
등의 연호를 사용하였다고 전한다. 그리고 『협계태씨족보』를 보면 발해의 개국조인 대조영 역시 '천통'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다고 한다.
즉, 발해는 건국자 대조영을 비롯하여 모든 임금들이 연호를 사용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학계에서 인정받지 못한 『한단고기』 「태백일사」 역시 발해의 역대 제왕들이 연호를 사용하였다고 전한다.
대수 묘호 연호 시호 이름
1 태조(太祖) 천통(天統) 성무고황제(聖武高皇帝) 조영
2 광종(光宗) 인안(仁安) 무황제(武皇帝) 무예
3 세종(世宗) 대흥(大興) 광성문황제(光聖文皇帝) 흠무
4 원의
5 인종(仁宗) 중흥(中興) 성황제(成皇帝) 화여
6 목종(穆宗) 정력(正歷) 강황제(康皇帝) 숭린
7 의종(毅宗) 영덕(永德) 정황제(定皇帝) 원유
8 강종(康宗) 주작(朱雀) 희황제(僖皇帝) 언의
9 철종(哲宗) 태시(太始) 간황제(簡皇帝) 명충
10 성종(聖宗) 건흥(建興) 선황제(宣皇帝) 인수
11 장종(莊宗) 함화(咸和) 장황제(莊皇帝) 이진
12 순종(順宗) 대정(大定) 안황제(安皇帝) 건황
13 명종(明宗) 천복(天福) 경황제(景皇帝) 현석
14 위해
15 청태(淸泰) 애제(哀帝) 인선
발해 문왕(3대 임금)의 넷째 딸인 정효공주의 무덤에는 발해가 황제국임을 증명하는 증거 중의 하나이다. 무덤입구에 발견된 묘지석을 보면 문왕을 가리키는 말로 '황상(皇上)'이라는 단어가 있다. 황상은 곧 황제로, 당시 발해인들이 자신들의 군주를 황상(황제)으로 부른 것이다. 이것은 고구려의 천하관을 계승한 것으로, 말갈 소수민족이나 북만주지역의 소수민족에 대해 발해 중앙 정부를 황제국으로 예우하도록 요구하고 그에 대한 답례를 한 사실로 뒷받침 된다.
발해국에서 최고 군주를 황제로 보고 관료기구를 편성한 것은 3사 2공 제도와 앞에서 제시한 독특한 연호 사용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게다가 발해의 태자를 왕으로 봉한데에서 발해의 임금이 스스로를 황제(또는 고구려처럼 태왕)라 칭했음을 알 수 있다. 『책부원구』권 1,000 외신부 수원조에 "발해군왕 무예는 본래 고려의 별종이다. 그의 아버지 조영이 동쪽에서 계루의 땅을 차지하고 새 나라를 세워 자신은 그 나라의 왕이라 하고, 무예를 계루군왕에 삼았다"
그런데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이 있다. 황제들은 일반적으로 자기의 아들들을 '왕'으로 책봉하고, 손자나 조카 등은 '군왕'으로 책봉하는 것이 당시 하나의 관례로 되어 있었다. 이런점으로 볼 때 대조영은 자신의 장자 대무예를 계루군왕이 아니라 '계루국왕'으로 책봉했을 것이다. 책부원구에서 군왕이라고 한 것은 이전 당나라 시기의 역사사료 등이 그 시기 사람들에 의해 왜곡되어 고쳐 씌여진 것을 옮겨놓은 것일 수 있다. 대무예가 아버지 대조영으로부터 계루왕의 책봉을 받았다는 것은 발해국이 대왕국가의 틀을 갖추고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협계태씨족보를 보면 "야발(대조영의 동생, 『단기고사』를 저술했다 알려짐)이 검교태위 반안군왕(盤安郡王)이 되었다"고 하였다. 이로보아 대조영의 아우인 대야발 역시 대조영으로부터 왕의 책봉을 받은 사실을 알 수 있다.
발해국의 관제 중에는 제국에서만 나타나는 3사 3공제가 있다. 요사를 보면 발해가 망한 다음 해인 927년 간은 발해국의 사도(司徒)였던 대소현을 동란국의 좌차상에 임명한 기록이 있다. 사도는 태위(太尉), 사공(司公)과 함께 3공의 하나로서, 3공제가 발해국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3공제는 3사제와 병존하는 만큼 3사제(태사太師, 태부太傅, 태보太輔) 역시 발해국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국왕에게 스승의 대우를 받는 3사는 최고의 벼슬로서 국왕에게 충고를 하며, 3공은 모든 관청을 지도하는 위치에 있으면서 제후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이처럼 제후적 존재가 발해국에 있었다는 것은 발해국이 제국으로서의 제도와 틀을 가지고 있었으며 황제인 군주 밑에 작은 왕들이 제후로서 존재하였음을 말해준다.
일본 구라시키시의 오오하라 미술관에는 발해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그런데 이 유물이 발해가 황제국이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이 유물은 함화 4년명 비상(碑像)으로, 함화란 발해 11대 임금인 왕 이진(이름, 묘호는 전해지지 않음, 다만 한단고기에 의하면 이진왕의 묘호를 장종이라 기록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그의 묘호는 장종, 또는 장왕이 된다)의 연호로 834년(함화 4년)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 비상은 허왕부(許王府)의 관리였던 조문휴의 어머니가 모둔 불제자를 위해 만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부분은 '허왕부(許王府)'라는 관청의 이름이다. 이는 발해에 왕으로 봉해진 이가 있었다는 뜻이 된다. 당시 중국의 제도를 참조해보면 왕부는 황제국(정확히는 황제를 주장하는 국가나 황제의 위치에 있는 나라)에서 개설할 수 있다. 허왕부라는 명칭의 등장은 발해가 황제국임을 주장하는 것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된다.
이상과 같이 발해에 대해 살펴보았다. 발해는 중국왕조에 번속된 지방정권이 아니라 고구려인이 세운 고구려의 후계국가이자, 지방정권이 아닌 당당한 독립국가였다. 요즘 학계에서 일부 학자들이 발해는 한국사가 될 수 없다고 떠들어댄다. 하지만 이는 발해사에 대한 무지에서 온 것이 아닐까?
박은식 선생은 국사는 그 민족의 혼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만큼 역사는 우리의 얼인 것이다. 역사가 있어야 내가 있고, 나라가 있는 것이다. 중국의 동북공정은 우리민족의 얼을 말살하려는 무서운 음모이다. 이러한 상황임에도 정부에서는 중국의 동북공정에 제대로 된 대응은 커녕 묵인하고 있으니.... 지하에서 신채호 선생과 박은식 선생이 통곡할 일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 역사에 대해 많이 알고 있는가? 역사가 없는 민족은 미래가 없다. 우리가 역사전쟁에서 승리하려면 우리의 역사에 대해 먼저 알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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