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농에 관한 환상과 진실 1 귀농의 길

귀농에 대해 막연한 환상을 지니면 실패하기 쉽다고 한다.
나도 그 한 예가 될지 몰라 이 기사를 스크랩하여 수시로 되뇌이고자 한다. 
농촌에 거주하면 몸도 마음도 한가할 줄 알았는데 몸은 정말 바쁘게 움직여야 할 것 같다.
또한 독서와 메모도 많이 하여야 발전할 수 있을 것 같다.


아직 본격적인 귀농은 하지 않았지만 텃밭농사를 지으며 공부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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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농귀촌 인구가 매년 최고치를 기록중입니다. 2012년 상반기 귀농귀촌인구는 8706가구 1만7745명에 이릅니다. 이들은 왜 도시를 떠나 시골로 향하는 것일까요? 귀농귀촌인 절반 이상은 4050세대이지만 2030 세대의 귀농귀촌도 늘고 있다고 합니다. '생태적 삶'을 살고자 귀농을 결심하는 이들도 많지만, 상당수는 자영업에 실패하거나 명퇴를 당했거나 도시생활에 지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시골에 가서 농사나 지어야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만만치 않습니다. 이에 <오마이뉴스>는 귀농귀촌의 리얼스토리를 들려드리려 합니다. 개인의 선택 차원을 떠나 뚜렷한 사회현상이 되어버린 귀농귀촌에 대한 실질적인 사회적 뒷받침이 이뤄지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편집자말]


 현재 살고 있는 집은 전형적인 농가주택으로 석면 지붕으로 오래된 집이다. 나중에라도 리모델링하려면 최소한 수천만 원이 든다.
ⓒ 임병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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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일어나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산책하다가 낮에는 소일거리 삼아 텃밭을 가꾸고, 저녁이면 마당에서 고기 구워먹으며 사는 것을 꿈꾸는 귀촌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베이비붐' 세대의 은퇴가 가속화되면서 2001년에 880가구에 불과하던 귀농,귀촌 인구가 2005년에는 1240가구, 2010년에는 4067가구, 2011년에는 1만503가구로 계속 늘어난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필자가 사는 제주에도 올 7월 말까지 3052명이 다른 지방에서 제주로 순유입됐고, 매달 400~500명 가량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이렇게 귀농, 귀촌 인구가 늘어나고 있지만 행복하고 성공적으로 정착해 사느냐고 묻는다면 선뜻 그렇다고 대답하기는 어렵습니다. 막상 귀농, 귀촌해서 현지에서 살아보니 어렵고 힘들어 다시 도시로 간 사람들도 꽤 되기 때문입니다. 귀농은 말할 것도 없이 힘들고, 그나마 쉽다고 여겼던 귀촌도 귀농만큼 힘듭니다.

귀농, 귀촌 인구의 60%를 차지하는 40~50대의 귀촌 생활 중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하는 일들을 모아봤습니다.

농약때문에 창문조차 열지 못하는 집

귀촌을 하는 40~50대 남자들의 로망은 평생 자신이 꿈꾸었던 그림 같은 집을 짓는 일입니다. 통나무집, 황토집, 조립식 주택 등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들만의 공간을 머릿속에서 설계하다 보면, 하루빨리 시골에서 살고 싶어 미칠 지경입니다. 그런데 이런 상상은 집 구하기에서부터 깨져버립니다.

전원생활을 꿈꾸는 사람들이 제일 먼저 찾는 곳이 각종 부동산 사이트와 귀농, 귀촌 카페입니다. 이런 곳에서 정보를 얻어 직접 답사도 하고 부동산 업자와 함께 땅주인이나 집주인을 만나 가격도 조정하다 보면 금방이라도 멋진 집이 생길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집이나 땅이 실제 어떤 곳인지 모르고 덜컥 샀다가는 평생 모은 재산을 일순간에 날리기 십상입니다.

▲ 귀촌집짓기 농촌에서 집을 구할 때는 주변에 어떤 농사를 어떻게 짓는지를 잘 알아봐야 한다. 요즘은 농약을 기계로 뿌리기 때문에 주변에 집이 있다면 그 집은 농약이 섞인 공기를 마실 수밖에 없다.
ⓒ 임병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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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이주자모임에서 나온 사례를 한번 보실까요?

"부동산 업자가 소개해준 집을 봤더니 넓은 들판에 4가구가 옹기종기 각자 개성이 담긴 멋진 전원주택을 짓고 살고 있었다. 확 트인 모습에 도시 생활에 넌덜머리가 난 아내와 나는 덜컥 계약금을 치르고, 서울에 올라왔다. 이삿짐센터와 연락해서 이사 갈 날짜를 앞둔 어느 날, 아이들에게 자랑도 할 겸 우리가 살 집에 잠시 가봤다.

이사 갈 집에 도착했더니 갑자기 매스꺼운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고, 쓰레기 태우는 연기가 자욱했다. 알고 보니 그 집은 대규모 농사를 짓는 밭 한가운데 있어 날마다 농약을 살포하고 있으며, 쓰레기 차가 들어오지 않아 마을 사람들이 번갈아 가면서 쓰레기를 밭에다 태우고 있었다.

내가 멋있다고 생각했던 전원주택 4채 중 2채에 살던 이웃들은 이미 그 집을 버려두고 도시로 도망치듯 나갔고, 다른 한 채도 월세로 돌려서 근처 일용직 사람들의 숙소로 이용되고 있었다. 퇴직금을 몽땅 털어 그 집을 샀던 우리 가족은 울며 겨자 먹기로 그 집에서 살 수밖에 없었고, 결국 매일 불어오는 농약 냄새에 창문조차 열지 못하고 집을 산 지 한 달만에 다시 집을 내놓았다." 

기획부동산들은 귀촌 인구가 늘자 저렴한 농지를 대규모로 사서 대지로 전환해 필지를 나누어 순진한 도시인에게 수십 배의 차익을 받고 팔기 시작했습니다. 멋모르고 이런 기획 부동산에 당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지불했던 가격을 건지기 위해 다시 집을 내놓지만, 그 집을 사는 사람은 어수룩한 귀촌 희망자이기에 이런 악순환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 귀촌집 구하기 아직도 시골에는 소를 키우는 곳이 많다. 이 때문에 마을 안쪽이라도 축사가 있는 집이 있는지, 그 축사에서 냄새가 나지는 않는지 꼭 따져봐야 한다.
ⓒ 임병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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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에는 아직도 '축사를 새로 만들기 어렵지만, 있는 축사를 없애기는 더 어렵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축사 주변에 집을 구하면 아침, 저녁으로 오리지널 농촌 냄새를 아주 진하게 맡을 수 있으며, 계절에 상관없이 파리, 모기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귀촌을 생각하는 사람이 스스로 열심히 공부해서 집을 짓는 방법도 있지만, 대부분 건축 사무소나 업자를 부르는데, 잔금 달라고 해서 줬더니 남은 공정 안 해주며 미루기 일쑤이고, 설계도면과 전혀 다른 자재를 사용하거나 부실 공사로 수도가 터지거나 벽이 갈라지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이처럼 귀촌을 생각하며 멋진 전원주택에서 살고 싶던 생각은 집을 구하는 과정이나 집 짓기, 어느 것을 해도 힘들고 어렵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경우가 부지기수입니다.

'지네만 보면 죽여야 사는 남자'

필자가 사는 제주 산간지방은 습기가 많기로 유명합니다. 여기에 근처에 축사까지 있는 탓에 각종 벌레와 나방, 지네가 집 주변은 물론이고 집 안까지도 등장합니다.

▲ 지네와 도마뱀 싱크대와 이불 속에서 나온 지네, 욕실 바닥의 도마뱀, 벽과 옷장 속의 거대한 바퀴벌레들. 그 가운데 가장 무서운 것은 자고 있는 이불에서 나온 사인펜 크기만한 지네다.
ⓒ 임병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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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모기는 애교 수준이고, 듣지도 보지도 못한 각종 벌레가 여름이나 겨울에 상관없이 나옵니다. 손바닥만한 나방을 시작으로 사람을 봐도 도망가지 않는 바퀴벌레에 뭔지도 모를 이상한 벌레들 때문에 우리집이 마치 곤충박물관이 된 듯한 착각이 들기도 합니다.

파충류도감에서나 볼 수 있는 도마뱀이 볼일 보고 있는 화장실을 지나갈 때면 군대까지 다녀온 남자도 깜짝 놀랍니다. 우리 집은 지네가 가장 무섭습니다. 제주에서 뱀에 물려 병원에 갔다는 사람을 보기는 어렵지만, 지네에 물려 응급실에 간 사람은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지네는 물리면 간혹 물린 부위가 퉁퉁 붓고 열이 날 수도 있는데, 이런 지네가 두 살짜리 아이와 함께 자는 이불에서 나오면 그날은 잠을 포기하고, 지네 색출 및 박멸 작업을 해야 합니다.

도시에서 평생 자란 사람들이 이런 벌레와 지네, 나방, 도마뱀을 집 안에서 보면 과연 어떤 생각이 들까요? 필자의 아내도 농촌에서 자랐지만 처음 지금 사는 농가주택에 이사했을 때는 각종 벌레 등이 약을 쳐도 기어 나오는 것을 보면서 어떻게 살 수 있을지 걱정하다 도시로 그냥 가려고도 했었습니다.

이처럼 자연 속에서 살면서 그 공간에 인간만 사는 것이 아님을 깨닫지 못하면, 하루에도 열두 번은 그 집을 나가고 싶어집니다.

넓은 창문으로 폼나게? 난방비 월 50만원 이상

잡지나 TV에서 보면 바깥 풍경이 보이는 넓은 통유리가 있는 거실이 너무 멋있게 보입니다. 그러나 농촌에서 살면 현실은 그런 낭만과는 거리가 멀게 됩니다. 물론 비싼 고급 자재를 사용하여 새로 지은 집은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래된 농촌주택은 단열이 되지 않아 겨울이면 밖의 풍경보다 오로지 집 안 온도를 유지하는데 급급합니다.

아직도 대한민국 농촌 지역은 도시가스가 들어오지 않은 곳이 많습니다. 그렇다 보니 대부분 지역에서는 기름보일러를 사용하는데, 요새처럼 기름값이 비싼 경우 한 드럼에 27만 원에서 많게는 29만 원까지 듭니다. 서울에 살 때처럼 따뜻한 난방을 하려면 최소한 한 달에 기름을 두 드럼 이상 사용해야 합니다.

이렇게 한 달에 두 드럼씩 든다고 계산하면, 최소한 5개월은(11월에서 3월까지) 난방을 해야 되는 농촌지역에서 난방비로만 연 270만 원이 듭니다.

▲ 보일러 겨울이면 방한용 비닐 차단막과 두꺼운 커튼을 출입구에도 설치한다. 세 드럼짜리 기름보일러에는 기름값이 무서워 겨우 한 드럼만 채운다.
ⓒ 임병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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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다 보니 비닐로 창문을 막거나 두꺼운 방한용 커튼 설치는 필수이고. 그러고도 기름보일러 밸브를 거실 또는 방 하나에만 열어 놓고 온 가족이 전기장판을 깔고 같이 자기도 합니다. 이렇게 노력해야 겨우 겨울철 난방비를 줄일 수 있지, 그렇지 않으면 일해서 번 돈의 대부분을 기름값으로 쓰게 됩니다.

우리 집처럼 평수가 작고 가족이 많으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두 가족이 사는 집이 평수만 넓다면 그 집을 유지하기 위해 겨울철에는 추위에 덜덜 떨던지, 아니면 돈으로 집안을 데우던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 살 수밖에 없습니다.

▲ 귀촌텃밭 텃밭에 심은 대파와 배추. 농약을 치지 않은 배추는 벌레 때문에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 임병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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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에서 텃밭을 조금이라도 가꾸어 본 사람은 그나마 괜찮지만, 농사 한 번 지어보지 못한 사람은 텃밭이라도 하려고 해도 만만하지 않습니다. 비료와 거름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모종을 심어도 작물은 자라지도 않고, 농약을 치지 않으면 먹을만한 크기로 자라지도 못하고 병충해 때문에 죽습니다.

잡초는 어찌나 잘 자라는지 예초기를 사용해도 일주일에 한두 번은 꼭 풀을 베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순식간에 텃밭이 아니라 정글이 됩니다.

준비된 귀촌만 성공할 수 있습니다

▲ 귀촌 석양이 지는 모습이나 일출을 보면서 자연에 사는 것을 느낄 수 있다.
ⓒ 임병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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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촌해서 좋은 집을 구하거나 짓고 사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집을 어느 정도 해놓고 막상 살아봐도 그리 좋은 일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시골에서 사는 일을 포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벌레나 추위 등이 힘들게 해도, 그것을 이겨낼 수 있을 만큼 자연에 산다는 것은 하나의 축복입니다. 도시에서는 느낄 수 없는 평화로움과 여유로움을 만끽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입니다.

준비된 귀촌은 충분히 성공할 수 있습니다. 단지, 귀촌을 아파트에 살 때처럼 아늑한 공간을 농촌으로 옮겨 놓고, 현관문을 나가면 자연을 즐길 수 있으리라는 환상으로 생각하면 견디지 못합니다. 앞으로 남은 인생을 인간과 자연이 함께 공존하며 사는 삶으로 바꾸고 싶다면 최소한 귀촌이 무조건 낭만적이지 않다는 마음가짐은 해야 할 것입니다.





돌이켜보면 농사짓고 살면서 안 해 본 거 없이 다 해 본 듯하다. 개집도 지어봤고 사람 사는 집도 지어봤다. 염색을 해서 옷도 지어 입었고 구들학교에 가서 구들 놓는 기술도 배웠다. 구들 학교는 말이 학교지 그냥 즐거운 여행이자 놀이였던 기억이다.

나이가 차고 때가 돼서 그랬을 수도 있지만 농사짓고 살면서야 비로소 비행기 타고 외국에도 나가게 되었다. 외국 여행은 귀농 17년 동안에 자그마치 중국 네 번. 인도 한 번. 일본, 독일, 필리핀은 각각 일주에서 열흘 정도씩 다녀왔고 인도는 오로빌공동체에 갔었다. 북유럽 5개국을 열흘 동안 돌아보았고 호주도 갔다 왔다.

진짜 농부는 잘 놀 수 있는 사람

특별히 기억에 남는 몇 가지가 있다. 겨울 농한기를 이용하여 석 달짜리 영화학교를 다녔는데 급기야는 내 작품이 상영되기에 이르렀다. 지방지에도 크게 실리고 영화감독(?)과의 대화라는 자리도 마련되어서 백여 명의 관객들 앞에 서기도 했던 일이다.

영화학교는 물론 공짜였다. 시골에 와서 살면서 대부분 공짜였다. 외국 여행도 공짜가 많았고 전주국제영화제도 세계소리축제도 공짜 표가 심심찮게 생겨서 매년 구경을 갔었다. 이럴 수 있었던 데는 비닐농사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비닐농사는 자연도 망치지만 사람도 잡는 농사다. 농한기가 따로 없이 늘 농번기라고 할 수 있다. 밤과 낮도 없을 때가 많다. 요즘 토마토농사 시설재배 하는 사람들은 일주에 세 번 정도를 선별·포장 작업을 하느라 밤 12시까지 일을 한다. 규모가 2천 평 정도면 일꾼 서너 명 고용해서 한다. 

그러나 겨울도, 비 오는 날도 비닐 농사를 안 하면 다 노는 날이다. 17년 동안 한 번도 비닐농사를 하지 않아서 다른 농부들 보다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었다. 어느 해 겨울은 옆 동네 풍물패에 끼어서 쇠와 장구를 쳤다. 공연은 못해 봤지만 기본 가락을 익혔고 어느 겨울은 단소 강습을 나가기도 했고 기타교실에 등록하여 청음력을 키우고 발성연습도 했다.

아쉽게도 전 과정을 마친 곳은 별로 없다. 여기 장수에 와서도 문인화 반을 다니면서 4군자도 그리고 전시회도 가곤 했지만 도중에 그만 두었다. 그냥 강박의식 없이 놀러가다시피 참여하다보니 과정을 끝내야 한다는 의지가 잘 작동 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이 나면 혼자서 먹을 꺼내 놓고 붓을 들곤 한다.

놀 수 있는 사람은 매여 있지 않아야 한다. 축산을 하는 사람은 아침저녁으로 꼭 그 시간에 짐승 먹이를 줘야한다. 자기가 못하면 누군가를 대신 하게 해야 한다. 앞에 예로 든 비닐농사도 마찬가지다. 겨울에 돈 들여 불 때 가면서 짓는 농사를 대충대충 할 수 없다.

사실, 일에 매여 밤낮 없이 일 년 내내 일하고 사나, 자연에 기대서 무리 않고 사나 큰 차이 없다. 돈 많이 버는 쪽으로 살면 쓰는 돈도 비례해서 커진다. 그때 쓰는 돈은 대개 자연을 훼손하고 사회 공공재를 망가뜨리는 쪽이다. 도리어 자연의 흐름에 맞춰 사는 게 건강도 지키고 마음도 지키고 자연도 지킨다.

계절과 절기와 날씨와 기후에 따르는 생활. 거기에 영향 받는 삶. 이게 놀이와 문화의 출발지점이 아닐까 싶다. 무릇 예술이라는 것은 삶의 승화이자 차원 변환이라고 생각한다. 일상이 굳건한 토대가 되어 그 위에서 다양한 형식으로 변주되는 것이 문화고 예술이라는 것이다.

농부의 달력은 다르다

대보름이나 한식, 단오, 백중 등 세시풍속이 다 그런 것이다. 계절 변화와 생활의 변곡점에서 몸과 농사일을 조절하는 행사다. 세시풍속을 월령(月令) 또는 시령(時令) 등으로도 불렀던 데서 알 수 있듯이 태음력을 기준으로 우주운행의 주기성과 변환성을 같이 담아 낸 세시풍속은 참 농부의 삶을 담고 있다.

노동과 분리되지 않은 놀이. 자연과 나뉘지 않은 노동. 완급이 조절되는 주기성과 변환성. 이보다 완벽한 무대가 어디 있겠는가. 농사짓는 사람의 터전이 바로 이렇다. 천리를 역행하지만 않는다면 농민이야말로 가장 예술적인 존재이다. 시인 박노해도 그렇게 말했다. 농부가 예술가라고. 온 누리를 무대로 매일 매일 작품을 만드는 예술가. 세상을 매일 디자인하고 쇄신하는 사람.  바로 농부다.

시골에 와서 살면서 그동안의 1주 단위의 달력이 슬그머니 장날 중심인 5일 단위로 바뀌었다. 일요일 개념이 없다. 국경일도 별 의미가 없다. 시골살이는 빨간 날이라고 공휴일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귀농해서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를 알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귀농해서 요일 개념이 바뀌는 체험을 누구나 한다. 쉬는 날은 하늘이 그때그때 정해주고 스스로 삶의 강약을 조절하면서 정하는 것이지 인간의 기념일 중심이 아닌 셈이다.

며칠 전에 우리 고장에서 공청회가 열렸다. 산골마을로 쓰레기공장이 들어온다고 하여 두 달 넘게 집회도 하고 차량 시위도 벌이는 중에 열린 공청횐데 낮 두시에 열렸다. 일기예보를 보고 잡은 날이다. 아니나 다를까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도시인들이 공휴일이나 주말에 촛불집회를 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공휴일을 스스로 만들고 그 날 사람들이 모여 공청회를 한 것이다.

실내 집회를 할 때는 이왕이면 바쁜 농사철이니까 비 오늘 날을 잡고, 길거리 시위를 할 때는 맑은 날을 잡는다. 날짜부터 잡아 놓고 날씨가 어떨지 걱정하는 도시사람들과 다르다.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이라는 것은 산 좋고 물 좋은 시골에 들어가 사는 장소 중심의 문제가 아니라 세상의 흐름과 생활의 흐름을 일치시키는 행위라 하겠다.

귀농해서 살려고 할 때 여러 가지 고려 사항 중 하나가 문화생활도 포함되는데 무대공연 중심의 문화를 생각하면 당연히 문화혜택이 적은 곳이 시골이다. 영화관이 없는 시ˑ군이 많고 뮤지컬이나 유명가수의 공연도 시골에는 없다. 그런데 사실 따지고 보면 도시에 살더라도 얼마나 영화관이나 연극공연장을 자주 찾으며 뮤지컬이나 유명세 있는 가수의 공연을 보는가? 실상은 그런 것이 중요하지는 않다고 본다. 귀농해 살면 문화 혜택이 빈약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문화에 대한 몰이해가 아닐까 싶다.

지역 축제와 마을 행사

며칠 전에는 우리 마을에서 바닷가로 봄놀이를 다녀왔다. 엊그제는 아랫마을에서 봄놀이 가는 날이었는데 마침 그날은 면사무소 앞에서 주민잔치가 열리는 날이었다. 면사무소 앞 주민잔치에는 옆 면에서 응원 차 풍물패가 와서 사물놀이를 해 주었다. 응원을 온 이유는 쓰레기 공장의 사업 불허가 났기 때문이다.

면민의 날, 군민의 날, 장애인의 날, 노인의 날, 지역 축제 서너 가지, 마을 계 정기총회, 지역 문화원 행사, 사진이나 문학 동호회의 행사 등등 운동장이나 저수지를 무대로 열리는 행사들이 1년에 열 손가락이 모자랄 것이다. 시골 어르신들은 장날이면 만 원짜리 한 장 들고 장에 가면 이 마을 저 마을 사는 친구들 만나 순댓국에 소주 한 병 시켜 놓으면 하루가 저문다.

면민의 날이나 노인의 날은 면 단위로 열리는 행사인데 같은 날 열리지 않는다. 이른바 유권자 관리(?) 차원이 아닐까 하는데 군수님이 오셔서 축사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군청 누리집에서 행사 날짜를 확인하고 면 마다 돌면서 논적도 있다. 수건 한 장은 기본이고 푸짐한 점심에 재수 좋으면 사은품 추첨에 당선되기도 한다.

지역 축제가 천편일률적이고 무대 중심의 연애인 공연도 많지만 실내행사는 드물다. 들판이나 산기슭에서 열린다. 판에 박은 품바타령이나 한 물 간 가수들이 등장해도 관객인 주민들이 아무데서나 덩실덩실 흥을 내서 육자배기 소리를 할 수 있는 조건이라 무대와는 별도의 무대가 마당에서 펼쳐지기도 한다. 전형적인 마당놀이 문화다.

요즘은 면 단위의 마을 풍물패 활동도 활발하다. 경연대회도 열린다. 곳곳에 큼직한 문화시설도 들어 서 있다. 주민자치센터는 갖가지 교양프로그램이 연중 진행되고 재주 있는 귀농자들이 강사로 출연한다. 삶 중심으로 형성되는 문화단위들이다. 생활과 밀착된 살아 있는 문화다.

봄에는 풍년 기원제, 가을에는 추수 감사제에 녹색당과 옛 민주노동당, 그리고 녹색평론 모임 등이 전통을 살리는 새로운 농촌문화를 일구기도 한다. 추렴하듯이 집에서 먹는 음식을 싸 와서 모임 때 공동식사를 한다든가 장구와 북, 쇠와 징이 기본으로 동원되고 누구나 소리 한 자락을 하는 모임들을 쉽게 본다.

재작년에 돌아가신 강대인 선생은 농장에 갈 때는 쇠와 장구를 들고 갔다고 한다. 작물들도 신명을 돋우기 위해서인데 놀이가 일과 결합된 모습이라 하겠다. 놀이 중 최고의 놀이는 '일하는 놀이'가 아닐까.

최근에는 '교육농장'이라 하여 교육청과 연대해서 학생들의 야외학습장으로 농장이 활용된다. 다양한 생활체험을 자연 속에서 살아있는 공부거리로 삼는다. 일과 놀이와 공부가 하나가 되는 셈이다. 생활을 지속케 하는 노동 속에서 인류는 지혜를 발달시켰다. 현대 문명은 본래의 생활노동에서 동떨어져 있지만 원래는 공부도 생활 속에서 진행되고 완성되었다. 그것의 복원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늘어 가면 좋겠다.

이제 여름이다. 도시로 나갔던 출향인들 중 고향 시골집으로 와서 부모도 뵙고 어릴 적 뛰놀던 계곡과 들판에서 더위를 식히는 사람들이 있다. 놀이가 몸도 망치고 삶도 왜곡시키는 도시의 저급한 문화가 옮겨 오는 기간이기도 하지만 농촌에서 겨우 명맥이 이어지는 살아있는 생활문화가 교류되는 기간이기도 하다. 농촌으로 삶의 거처를 옮겨오는 사람들에 의해 이런 교류가 더욱 촉진되길 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한살림의 <살림이야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소박하게 살려고 귀농했는데... 빚더미에 앉았습니다

[귀농에 관한 환상과 진실②] '귀농푸어'가 되어버린 김씨 이야기

12.11.12 15:59l최종 업데이트 12.11.12 17:44l
오마이뉴스  오창균(ockhh) 기자



"왜 귀농하려고 합니까?"


얼마 전, 불교귀농학교 회향식에서 도법스님이 한 말이다. 귀농학교가 시작되던 때부터 귀농에 대한 꿈을 가진 이들에게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던 스님은 30여 명의 귀농교육생들 앞에서 조용히 질문을 던졌다.

"..."

누구도 선뜻 먼저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잠시 침묵이 흐른 후에야 몇 사람이 왜 귀농을 하려는지에 대한 생각을 털어놨다. 지금의 생활이 행복하지 않아서, 무한 경쟁하는 자본주의 삶에서 벗어나고 싶어서라는 즉답들이 나왔다. 그러자 스님의 즉설이 이어졌다.

"도시에서 행복하지 않는데 농촌으로 귀농한다고 저절로 행복해지거나 경쟁하지 않는 삶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까? 그것은 여러분들의 착각입니다."

일순간 또 다른 침묵이 흘렀다.

올해 귀농인구가 사상 최대인 1만 가구를 넘었다고 한다. 농촌인구가 늘어난다는 점에서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충분한 준비 없이 귀농했다가 후회하는 사람들도 많다. 내 지인 김선일(43, 가명)씨가 바로 그런 우여곡절을 겪은 사람이다.

 귀농에 대한 섣부른 기대보다는 자신에게 맞는 귀농을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
ⓒ 오창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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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농 2년만에 다시 서울로

김선일씨는 16년 전,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귀농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도법스님의 말씀을 품고 귀농학교에 다니면서 착실히 귀농을 준비했다. 정착할 지역을 찾아다닌 지 몇 년, 드디어 강원도 어느 농촌마을에 폐가를 얻어 아내와 갓 돌이 지난 아들을 데리고 서울을 떠났다. 때는 IMF의 검은 망령이 중산층 아래의 삶들을 파괴하던 1999년, 반지하 전세금 2500만 원이 새 삶을 펼칠 종잣돈이었다.

김씨는 품팔이 농사일과 궂은일도 마다않고 나섰다. 동네사람으로 빨리 인정받기 위한 노력이었다. 그러나 농촌의 인심도 각박한 시대를 피할 길은 없었던지 굴러온 돌이 알아서 피해가야 하는 게 현실이었다.

1년 뒤 옆 동네로 집을 옮겼다. IMF로 인해 평탄한 삶에서 튕겨져 나온 노숙자들과 함께 산에 올라가 벌목하는 일을 하면서 살림살이를 꾸려나갔다. 그러면서 농사지을 땅을 알아보았지만, 때마침 펜션 투기바람이 불어닥쳤다. 전세금 2500만 원으로는 어림도 없을 만큼 땅 값이 치솟았다. 안정적 수입조차 없어 경제적으로 쪼들렸던 김씨는 정착이 불가능하리라 보고, 미련 없이 짐을 싸서 서울로 돌아왔다. 2년만의 리턴이었다.

그러나 다시 돌아온 서울에는 전세대란이 기다리고 있었다. 귀농할 때 땅 사려고 가져갔던 반지하 전세금 2500만 원을 그대로 가져왔건만 그 돈으로 전셋집을 구하기란 불가능했다. 선택할 것도 없이 처갓집 방 한 칸을 얻어 다시 서울생활을 시작했다. 다행히 전에 다니던 직장에 취직이 되었고, 아내도 보험설계사로 일을 시작했다.

그토록 떠나고 싶었던 도시로 다시 돌아온 생활이 행복할 리 없었지만 귀농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기에 1년간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휴일이면 다시 정착할 귀농지를 찾아서 전국을 누볐다. 한창 귀농 열기가 뜨거웠던 시기라 귀농을 준비하는 이들의 귀를 솔깃하게 하는 다양한 지원 사업이 쏟아졌고, 지원금 액수를 놓고 정착지를 결정하는 이들이 생겨날 정도로 귀농인구를 유치하려는 지자체의 경쟁도 뜨거웠다.

 귀농정착대출금은 집을 짓는데 쓰였다.
ⓒ 오창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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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농정착금 받아 2차 귀농을 실행했지만

2002년, 김씨는 1년여 만에 서울생활을 다시 청산하고 두 번째 귀농을 실행했다. 첫 귀농의 경험을 떠올려볼 때, 처음부터 내 땅을 가지고 시작하는 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김씨는 아껴둔 전세금 2500만 원으로 산중턱의 비탈진 땅 300여 평을 구입하고 4% 이자의 귀농정착금 4500만 원을 10년 뒤에 갚는 조건으로 대출을 받아서 가족의 보금자리가 되어줄 아담한 집과 농사지을 밭을 개간했다.

귀농을 하게 되면 동네 사람이 빨리 되어야 한다는 첫 귀농지에서의 경험 때문에 여기에서도 온갖 궂은일을 마다않고 찾아다녔다. 조금 손해 보는 일이라고 해도 묵묵히 참아내며, 마을일이라면 '내 일'보다도 먼저 거들고 나섰다.

농사가 점차 손에 익을 무렵에는 여러 귀농인들과 함께 협동 작목반을 만들어 농산물과 발효효소 등을 공동 생산했다. 이를 도시 소비자들과 직거래하거나 장터를 통해 판매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그러나 작목반도 지자체의 지원을 받게 되면서 사업내용이 많아지고, 작목반의 방향을 놓고 이견이 생기기 시작했다. 결국, 김씨는 몇몇 귀농인들과 함께 탈퇴를 하게 됐다.

 수세미 농사를 지어서 발효효소를 만들기도 했었다.
ⓒ 오창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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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적으로 농사일을 시작한 김씨 부부는 인터넷카페를 통해 알게 된 도시민들과 지인들에게 농산물 직거래를 하게 됐다. 많게는 한 달에 40~50가구에 정기적으로 농산물을 판매하는 등 순조롭게 출발했다. 부족한 농산물은 지역의 특산물과 농산물을 받아서 보내기도 하고, 두부와 된장 만들기 같은 체험을 진행하기도 하면서 경제적으로 숨통이 트이는가 싶었다.

그러나 호사다마였다. 예기치 않은 일이 발생한 것이다. 김씨가 허가 없이 된장을 판매한다며 군청으로 식품위생법 위반 고발장이 접수됐다. 공무원이 집에 다녀가고 법조항의 압박을 받게 되자 김씨 부부는 허탈감을 넘어 분노했지만, 현실은 가난한 귀농인을 변호해 주지 않았다. 이후 경찰 조사를 거쳐 혐의 없음으로 결론이 났지만 그 후로 직거래는 중단되었다. 이후부터 김씨는 산림벌목을 하는 공공근로사업에 참여하여 일을 하고 있다.

귀농 성공자보다 '귀농푸어'가 될 수밖에 없는 현실

"귀농 방식은 사람들의 생각만큼이나 다양하기 때문에 성공과 실패의 이분법으로 규정할 수 없다. 내 귀농은 계속 현재진행형이다."

김씨에게 자신의 귀농을 성공이나 실패로 규정할 수 있겠느냐고 묻자 돌아온 답이다. 10년 전, 귀농할 때 받았던 정착지원금 4500만 원은 다 갚았느냐고 다시 물었다.

"농협에서는 원금상환을 못할 처지에 놓인 농민에게 또 다른 대출상품을 권장한다. 별다른 방법이 없어서 7% 이율로 대출을 받아서 4%로 받은 처음의 대출금을 갚았다. 앞으로도 뾰족한 방법이 없는 한 이자만 갚다가 원금상환일에 또다른 대출을 받아서 갚아야 하는 악순환의 고리에 걸렸다. 신용카드 돌려막기와 다름 없다."

 단순 소박한 삶을 살고자 하는 그에게 빚은 큰 짐이다.
ⓒ 오창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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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농한 지 20년이 넘은 어느 농부로부터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억대 수익 올렸다고 언론에 소개되는 농민들이 실상은 빚의 덫에 걸려있는 경우가 많다고. 늘어가는 빚 때문에 한탕주의 농사가 아니면 헤어나올 수 없어 도박 같은 농사를 한다는 것이다. 그 농부 또한 현재 가진 것을 모두 털어내야 빚을 갚을 수 있다고 했다.

충분한 준비 없이 귀농을 한다거나 정착지원금 대출을 받았다가는 '귀농푸어'가 될 수도 있다. 김씨는 자신의 경험과 그동안 겪어본 귀농인들을 보면서 '빚' 없는 귀농을 하라고 충고한다. 도법스님은 "물질에 대한 욕망과 도시적인 소비방식을 버리는 내면의 깨달음이 먼저 선행되어야만 답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왜 귀농하려고 합니까?"



[귀농에 관한 환상과 진실③] 농림부 귀농귀촌의 꿈, 믿지 마십시오

12.11.15 15:47l최종 업데이트 12.11.19 11:18l
오마이뉴스   김병기(minifat)       장지혜(jjh9407)

귀농초보 월수입 최대 50만원...그래도 할래?


 농림수산식품부 '귀농귀촌의 꿈' 광고 일부
ⓒ 농림수산식품부

"여보, 우리 귀농할까?"
"귀농이요?"
"어때?"
"좋죠? 근데 공기만 먹고 살 수 있나요?"

막연하게만 느껴졌던 귀농귀촌의 꿈, 준비된 귀농으로 농촌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건 어떨까요. 귀농귀촌의 꿈 생각보다 어렵지 않습니다.

공중파를 통해 나오는 농림수산식품부의 40초짜리 광고 '귀농귀촌의 꿈' 일부다. 광고를 보고 있자면 영농교육도 해주고 자금지원도 해주니, 귀농해서 좋은 공기 마시면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정부의 도움으로 말이다.

하지만 ㈔전국귀농운동본부 박용범 사무처장은 농림수산식품부가 틀렸다며 "귀농은 한 사람의 삶을 통째로 옮겨 놓는 것이기 때문에 생각보다 어렵다"고 말했다. 정부의 자금지원도 담보 등 조건이 까다롭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전문가도 어렵다는 '귀농귀촌의 꿈'. 그냥 접어두어야 할까. 그는 꿈을 접는 대신, 마음가짐을 바꾸라고 말한다. 박 사무처장은 "귀농의 최종 목표는 욕망을 그대로 두고 소비를 줄이는 것이 아니라, 욕망 자체를 줄이는 데 있다"며 "소득보다는 삶의 행복을 찾기 위해 가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처음에는 수익도 기대하기 어렵다. 그는 "1년 차 귀농자가 월 50만 원을 벌면 많이 버는 것"이라며 '자발적 가난'을 강조했다. 시골도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으므로 고향집을 기대해서도 안 되고, 도시의 소비 패턴도 버려야 한다.

이쯤 되면, 귀농의 꿈? 그냥 접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귀농학교 첫 수업 후 환불받는 학생도 종종 있을만큼 귀농에 대한 기대치를 낮추는 게 그의 주 임무다. "기대치를 낮춰서 내려가야 귀농에 실패할 확률도 줄어든다"는게 그의 설명이다.

그래도 귀농이 매력적인 이유? 바로 자립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기 때문. 박 사무처장은 "귀농을 하면 자기 인생을 스스로 해결하고 판단하는 것, 즉 '자기 삶의 결정권'을 갖게 된다"며 "먹고 입는 걸 직접 생산할 때 행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지난 2일, ㈔전국귀농운동본부 박용범 사무처장을 만났다. 인터뷰는 경기도 군포시에 위치한 전국귀농운동본부에서 진행됐다. 다음은 그와의 일문일답이다.

"도시가 살만하지 않아, 자영업자 붕괴도 한 몫"

 박용범 사무처장
ⓒ 김병기

- 꾸준히 귀농·귀촌현상이 늘고 있다.
"생태 가치를 중요시해 자급자족의 삶을 살겠다는 사람은 꾸준하다. 사회가 말하는 증가추세에 속하는 사람들은 경제상황과 맥을 같이 한다. 도시가 살 만하지 않은 게 가장 큰 이유고, 자영업자가 붕괴하고 있는 것도 한 몫 한다. 1997년 IMF가 발생했을 때도 귀농·귀촌자가 많이 늘었다."

- 1996년 ㈔전국귀농운동본부가 창립됐다. 창립 취지 및 하는 일을 소개해 달라.
"IMF가 터지기 1년 전, 자본의 거품이 극에 달했을 때 답은 '반자본'에 있다고 생각했다. 생명과 평화를 생각하는 젊은이들을 시골로 내려 보내야 한다고 말이다. 가톨릭농민회, 정토회 등 14개 단체가 모여서 만들었다. 주로 귀농을 희망하는 사람을 상대로 교육에 집중한다. 귀농학교는 일주일에 두 번씩, 두 달간 진행된다. 텃밭농사도 지어보고 농가로 현장실습도 간다. 1기수에 50, 60명 정도이며 강좌비는 20만 원이다. 궁극적인 교육의 목적은 정착에 있다."

- 귀농운동본부를 통해 귀촌한 사람은 몇 명 정도인가.
"지금까지 5천여 명이 교육을 받았는데 그 중 20~30%가 귀농, 귀촌했다."

- 주로 어떤 직종 종사자가 이곳을 찾나.
"IT쪽이 많다. 연령대는 40대로 치과의사, 학교 선생님, 기업인 등 다양한 직업인들이 온다. 사회의 정년이 빨라지고, 직장의 미래가 어둡다보니 찾아오는 연령대가 점점 낮아지는 추세다. 아토피를 앓는 아이를 둔 부모들도 많이 찾는다.

얼마 전 강남에서 예약제로 치과를 운영하던 치과의사도 이곳에서 교육을 받고 지금은 봉화로 내려갔다. 현직 검사도 농촌생활을 하고 싶다며 이곳에서 교육을 받고 귀농했다."

- 귀농자와 귀농운동본부와의 네트워크는?
"귀농지원센터가 전국에 6개 정도 되는데 귀농학교 출신 선배들이 맡아서 일을 하고 있다. 선배들을 통해서 알음알음 귀농하는 경우가 가장 많고 정착률도 그만큼 높다. 귀농학교를 수료한 사람에게는 귀농자인증 마크가 찍힌 스티커를 준다. 보통 귀농자들은 생협 생산자로 들어가기 힘든데 귀농자인증이 있으면 좀 수월하다."

"귀농할 땅 선택은 운명, 그러나 '5W'는 고려해야"

 텃밭을 설명하고 있는 박용범 사무처장
ⓒ 김병기

- '귀농' 성공과 실패의 지침서가 있다면?
"귀농학교에서 수업을 받은 5천여 명 중 1500명이 내려갔고 그 중 150여 명은 실패하고 올라왔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귀농에 성공하려면 일단 기대를 해서는 안 된다. 농촌의 현실은 옛날과 다르다. 외갓집 같은 고향을 생각하면 안 된다. 기대를 많이 하다보면 텃새도 그만큼 심하다고 느낀다.

도시의 소비패턴을 그대로 가져가서도 안 된다. 1년 차 농사자는 월 50만 원을 벌면 많이 버는 거다. 귀농은 소득보다 삶의 행복을 찾기 위해 가는 거다. 그래서 '자발적 가난'을 많이 이야기한다. 귀농학교 첫 시간에 '내가 귀농을 해야 할 10가지 이유'를 꼭 쓰게 하는데, 귀농은 한 사람의 삶을 통째로 옮겨놓는 것이기 때문이다. 귀농해야 할 이유 10가지를 쓸 수 있으면 빨리 내려가는 게 좋다."

- 귀농할 때 장소는 어떻게 선택해야 하나.
"지역의 선택은 운이다. 결혼할 때 인연을 만나는 것과 같다. 꼭 어느 지역에서 어떤 작목을 하겠다는 계획이 없다면 지역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단, 몇 가지 확인해야 할 것이 있는데 바로 '5W'다. 5W의 첫째는 'WATER'. 우선 물이 있느냐가 중요하다. 지하수조차 부족한 곳이나 상류에 오염원이 동네가 있다. 둘째는 'WON'이다. 이유가 있다. 싼 땅은 길이 안 나있거나 전기가 안 들어오기도 한다. 무조건 싼 땅을 찾으면 낭패보기 일쑤다. 다음은 'WITH'. 누구와 가느냐다. 함께 내려가서 살 사람과 함께 결정하는 게 낫다. 그래야 불만이 줄어든다. 네 번째 'WAY'. 길이 없는 땅이 많다. 지적도를 떼 봐야 한다. 도로가 없으면 집도 지을 수도 없다. 마지막 'WORK'. 그 지역에 맞는 작목을 선택해서 들어가는 게 좋다." 

-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잘 정착했다고 볼 수 있나.
"보통 3년차 이상 돼야 고비를 지나 시골에 정착했다고 말할 수 있다."

- 1~3년 버티는 데 가장 힘든 것은 무엇인가.
"무엇보다 외롭다. 도시에서는 친구들이 옆에 있는데 시골에서는 그렇지 않다. 귀농을 하고도 서울에 자주 가거나 시골로 친구들을 부르는 사람이 있는데 별로 좋지 않다. 그 마을 공동체로 들어가야 한다. 아니면 주변 귀농자들과 교류하면서 외로움을 풀어야 한다."

- 아이들을 데리고 귀농할 경우, 치안과 교육 등을 걱정하는 부모가 많다.
"극단적으로 두 가지 중 한 개를 선택해야 한다. 어느 정도 교육에서 욕심을 내려놓던지, 아니면 직접 학교 운영위원회로 들어가서 학교의 운영방법을 대안학교처럼 바꾸던지."

'생태귀농'만이 정답... 자립자족의 삶 살아야

 귀농운동본부 텃밭.
ⓒ 김병기

- 귀농운동본부는 생태귀농을 강조한다. 생태귀농이라는 말이 좀 생소한데.
"땅을 개간하고 농사를 짓는데 사람의 영향력을 줄이자는 것이다. 비료, 농약 등 외부 자원을 들여와서 농사를 짓고 마을을 지속시키는 게 아니라, 자연과 조화를 이루면서 농사를 짓자는 것이다. 여기서 자립적인 마을 공동체도 나온다."

- 정부는 대농과 기업농을 집중적으로 육성하는 반면, 귀농운동본부는 '소농'을 권장한다.
"대농일수록 기계를 써야하고 그러면 단작을 해야 한다. 대농은 비용이 많이 발생할뿐더러 땅도 심각하게 훼손한다. 현재 토양의 평균 유기물 함량이 2%밖에 되지 않는다. 땅의 지력이 훼손되고 있다. 대농은 생태적이지도 않고 지속가능하지도 않다. 결국 소농만이 지속가능한 농업이라는 생각이다. 보통 3천 평 정도면 소농이라고 이야기 한다."

- 귀농·귀촌자들을 위해 지자체가 해야 할 일은?
"귀농자들이 내려올 수 있는 여러 가지 조건을 마련해 줘야 한다. 의료, 문화 등 서비스 말이다. 개개인에게 지원하는 것보다 마을 살리기를 통해 공동체 전체에 지원하는 게 낫다. 마을 살리기를 하려면 인적자원과 조직이 필요한데, 그 대표적인 예가 홍성의 문당리의 마을이다."

- 귀농의 가치에 대해 한 마디 해 달라.
"자연과 더불어 살자는 것이다. 귀농은 곧 자립적, 전인적인 삶을 영위하는 거다. 먹고 입는 걸 직접 생산할 때 행복할 수 있다. 도시에서의 욕망을 그대로 두고 소비를 줄이는 것이 아니라, 욕망 자체를 줄이자는 것이다. 자기 인생을 스스로 해결하고 판단하는 것, 즉 자기 삶의 결정권을 갖는 게 진정한 귀농이다."

10년 전부터 귀농을 꿈꿨던 박 사무처장은 맡은 일 때문에 자신의 꿈을 미뤄둔 상태다. 무조건 2년 안에 자신을 받아주는 땅으로 내려갈 계획이란다. "시골에 내려가면 가족이 먹을 것을 심고, 남는 것은 이웃과 나누며 절대 매이지 않는 삶을 살겠다"는 박 사무처장의 말이 귀농의 모든 것을 설명해 주고 있었다.

최근 보도된 바에 의하면, 지난해 귀농가구는 6500여 가구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뿐만 아니라 2001년부터 2011년까지 농촌으로 이동한 인구가 12배나 급증했다고 한다. 비단 정부의 부추김 때문만은 아닐 터. 앞으로도 이런 추세는 계속될 전망이라고 한다.

누구나 한번쯤 꿈꾸는 귀농, 귀촌. 하지만 박 사무처장의 말처럼 내려놓아야 할 것도, 버려야 할 것도 생각보다 많다. 먼저 펜과 메모지를 준비하시라. 그리고 '내가 귀농해야 할 10가지 이유'를 적어보시라. 답은 보다 쉬운 데 있을지도 모른다.

 도심에서 월 400만 원 벌었으니, 귀농해도 200만 원은 벌겠지?
귀농자가 조심해야 할 5가지
 (사)귀농운동본부 명함
ⓒ 김병기

박용범 사무처장은 명함부터 달랐다. 전국귀농운동본부 6명 활동가들의 이름과 전화번호, 이메일 주소를 빼곡하게 적었다. 앞장을 보니 큼지막한 글씨로 '국민 모두가 농부'라고 써 있다. 취지를 물어봤다.

"농사를 짓는 사람만 농부가 아니다. 농부들이 흘린 땀의 가치를 소중하게 생각하면서 책임감있게 먹는 것도 농사의 일부다. 도시에서 상추 하나를 키우는 사람도 농부다. 자연 생태의 소중함을 아는 사람은 모두 농부다."

박 사무처장의 말처럼 귀농운동본부는 '생태 귀농'을 중시한다. 몇만 평 규모의 대농보다 3000여 평 정도의 소농이 가장 바람직한 모델이라고 추천하기도 한다. 귀농운동본부 사무실 근처에는 소농 학교가 있기도 하다. 농사 초보생 학습장이다.

다음은 박 사무처장이 말하는 귀농자가 고려해야 할 5가지다. 

1) 도심에서 월 400만 원을 벌었으니, 농촌에서 200만 원은 벌겠지?
천만에! 수익에 대한 기대는 버려라. 도시생활 청산하고 시골 내려가면 수입이 줄어드는 것은 당연지사. 하지만 더불어 지출도 줄어드니 수입이 반정도로 줄어도 생활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금물. 처음엔 수입이 없을 수도 있다. 배 굶으면서 절약할 생각을 하라.

2) 배산임수가 귀농하기 좋은 곳?
귀농희망자들은 배산임수를 희망하는 경향이 있다. 무주, 진안 등이 대표적인 곳이다. 그런데 산이 많은 곳은 땅이 비교적 험하다. 마을이 형성 안 된 곳도 많고 인적도 드문드문하다. 불편할 수 있다. 귀농지는 꼼꼼하게 따져봐야 한다.

3) 개량한복 입으면 왕따?
여러분이 생각하는 귀농자 복장은? 개량 한복 입고 수염 기르고, 큰 개 한마리 끌고 다니는 모습인가. 물론 괜찮다. 하지만 여기서 팁 한 가지. 처음 귀농해서는 개량한복보다 옷장에 넣어둔 오래된 점퍼를 꺼내 입으시라. 새마을운동 때나 썼음직한 모자 하나는 덤. 길 가다가 이웃 주민이 먼저 친구하자며 다가올 수도 있다.

4) '팔랑귀'를 버려라.
귀농하려다가 실패한 사람들은 대부분 '팔랑귀'다. 옆에서 잘 된다는 작목이 있으면 앞뒤보지 않고 투자를 한다거나, 겁 없이 덤빈다. 어떻게 보면 '욕심'이다. 겁없이 덤비지 마라. 그러다가 금방 쪽박 찬다.

5)농사만 고집하진 말자.
농촌으로가면 무조건 농사만 지어야 한다? 아니다. 자기가 가진 문화적 능력을 펼치는 사람도 있다. 대표적으로 '귀농가수'가 있다. '귀농인의 날' 등 우리 행사에도 초청된다. 또, 번역을 할 수도 있고, 학생들을 가르칠 수도 있다. 이런 능력을 지역공동체를 위해 사용하면 다양한 생태 공동체가 될 수 있다.

도시의 베이비붐 세대 66%가 농어촌 이주를 원한다는 여론조사 결과도 있다. 최근 들어서 귀농·귀촌 인구가 늘고 있다. 지금도 숨 막히는 도심을 떠나서 하루 빨리 떠나고 싶은 열망을 갖고 있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박 사무처장은 강조한다. 귀농은 도피처가 아니라고. 목가적인 삶이 아니라 자연을 벗삼아 지역공동체와 함께 새로운 삶을 살만한 자세가 된 사람들이 귀농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그의 외투 소매자락은 닳아서 너덜너덜했다. 흙먼지가 뽀얀 그의 트럭 안은 농촌에서 본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가 건넨 명함에서도 여럿이 함께하고 있다는 온기가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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